1.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가장 유행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를 들라고 한다면 필자는 서슴지 않고 '영성'이란 말을 제시하고자 한다. 교회에서 이미 영성은 모든 분야를 관통하는 일종의 해석학적 코드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사제 영성, 수도자 영성, 평신도 영성, 순교 영성, 여성 영성 등 이루 하아릴 수 없이 많은 주제가 모두 영성의 옷을 덧입고 마치 새로 태어난 듯 교회의 다양한 분야를 수놓고 있다.
각종 출판물에서부터 교회 관련 신문들, 신학교, 본당마다 쇄신을 부르짖으며 영성을 논한다.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얼마나 영성의 의미를 깊이 헤아리고 그 의미에 맞게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한국 교회는 지난 250여 년간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토대를 만들어 외형적인 틀을 갖추는 데 대부분의 신간을 보냈다. 이제 제법 갖춰진 그 틀이 내실 있는 훌륭한 건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틀을 다양하고 풍요로운 영성으로 채워야 한다. 이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당면한 시대적인 소명 가운데 하나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영성은 단순히 신비스럽고 추상적인 그 무엇인가를 애매모호한 표현에 담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것이자 구체적인 삶이며 역사이다. 그것은 인간이 어디에서 유래했으며 긍극적으로 어디를 지향하는지, 그리고 현재 자신이 자리하고 있는 구체적인 토대는 무엇인지, 더 나아가 지금 이 자리에 오 시까지 그가 거쳐 온 역사를 구성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하는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제반 요소들을 바탕으로 이해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영성은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다른 실재들, 특히 다른 인간과 맺는 관계를 통해 삶 속에서 형성되어 간다. 인간은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모든 실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성취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맺는 인격적 관계는 그의 인격적 성숙을 가능케 하는 장(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관계적 차원은 인간 존재의 신비를 열어젖히는 관문이다. 그가 자신의 삶을 통해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부딪히는 사건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가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으며 동시에 그가 누구인가 하는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해 준다.
그런데 영성이라 함은 단순히 인간과 인간 사이 또는 인간과 사물 사이의 수평적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기 존재의 근거이자 최종 목적인 하느님과 맺는 관계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성은 하느님과 개별 인간이 맺는 고유한 관계성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고유한 관계 맺음의 방식을 말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의 모상에 따라 창조하심으로써 인간에게 우선적인 관계를 맺어 주셨다. 그 관계는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근거한 무상적이고 창조적이며 일방적인 관계를 말한다. 이러한 하느님의 관계 맺음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바탕이다. 사실, 인간이 관계적 존재라 함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특징에서 유래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위격 간의 사랑의 관계를 바탕으로 존재하며 그 관계의 충만함이 넘쳐나 창조를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면에서 볼 때 하느님을 닮은 인간 역시 관계적 존재이다.
영성은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에 각자가 건네는 고유한 관계성을 말한다. 그것은 그가 하느님의 사랑에 어떤 방식으로 응답했는가 하는 것을 말함이며,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영성적 색채를 결정짓는다. 그러므로 영성에 대한 올바른 접근과 이해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파트너인 인간은 누구이며 그가 맺는 관계의 방식은 무엇인가가 그만의 영성을 특정 짓는 중요한 바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성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자 그를 구성하는 제반 요소들에 대한 이해의 문제로 영성은 인간학을 바탕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어떤 실재들과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잠정적인 정체성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이며 이는 그가 세계와 맺는 관계 맺음의 방식을 규정지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성은 인각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로 들와 심리학, 문화인류학, 생물학, 의학 등 제반 학문을 통해 인간에 대한 수많은 영구 결과가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결과를 종합한다 해도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제시해 줄 수는 없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의 기원에 대한 물음이자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물음은 필연적으로 철학적. 신학 특징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영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바탕을 제시하는 인간학은 크게 '철학적 인간학'과 '신학적 인간학'으로 나뉠 수 있다. 저자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이성적 분석과 더불어 그가 누구인지 연구하는 반면, 후자는 계시의 빛 아래서의 인간 이해를 도모한다. 비록 전자가 직접적으로 영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성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존재의 근본 요소들에 대한 제시를 통해 영성을 논할 수 있는 간접적 바탕을 제공한다. 반면, 후자는 전자에 비해 보다 직접적으로 영성을 말할 수 있는 다탕을 제공한다. 신학은 이미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바탕에 두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번 호를 통해 먼저 신학적 인간학과 영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다음 호를 통해서는 철학적 인간학과 영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