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숨어 계시고 동시에 드러내시는 하느님
숨어 계신 하느님과의 사람 속에서 사랑하는 님하, 당신은 어디에 숨으셨나요? (영적 찬가 제1노래)
첫 번째 노래부터 영혼은 감각적 만족을 찾지 않고 인간적 개념과 지식을 초월하여 숨어 계시는 하느님의 본질과의 합일을 찾는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가 때때로 하느님 현존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상기시켜 준다. "하느님과 숭고 한 친교를 나누거나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해도, 그것이 당신께서 은혜로이 현존하신다는 확실한 중거가 될 수는 없으며, 영혼 안에 메마름이 오거나 모든 것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께서 영혼 안에 계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영적 찬가 1.3).
이 시가 인도하는 사랑의 합일에서조차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생명이 지속되는 한 영혼에게 여전히 숨어 계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히 다르심에 대한 의식을 향해 순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정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신적 생명에로 이끄시는 주체적 행위자이시다. "우선, 영혼이 하느님을 찾는다면 사랑하는 님께서는 그녀를 훨씬 더 많이 찾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사랑의 산 불꽃 3, 28).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어 그리하여 우리를 높여 주시고 멀리 물러나시어 우리를 사랑의 고통스러운 갈망 속에 놓아두신다.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숨어 계시는가?
훌륭한 관상가는 사랑으로 당신을 찾아야 한다.(영적 찬가 1,6)
우리는 성자의 계시에서 하느님을 찾는다. "성자께서는 성부의 유일한 기쁨이시기에, 성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쉬지도 계시지도 않으신다"(영적찬가 1,5),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찾는 이 시의 사랑하는 연인과 같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가까이 가기를 원할 때 저 먼 곳에 계시는 듯하다.
성자의 계시 외에 삼위일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경험은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마음속에서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말씀'께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본질적으로 현존하시며 숨어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영적 찬가 1,6).
하느님께서는 본질적으로 건 은총이나 영적 애정에 의해서건 당신의 현존이라는 신적 선물 안에도 숨어 계신다. 하느님께서 숨어 계신 장소는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너 자신이 당신께서 살고 계신 방이고 숨어 계신 골방이며 은신처이다"(영적 찬가 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찾기 위해 우리 자신의 바깔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되고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더 커다란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시고 사랑하는 님을 드러내 주지만 당신께서는 드러나시기보다는 더욱 숨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영적 찬가 13,2). 영호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조차 그녀는 합일과 그녀가 소망하던 당신의 장엄하심과 신성의 빛을 어느 정도 엿볼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되돌아오아(영적 찬가 13,2)는 말을 듣는다.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하느님께서는 숨어 계시며, 우리는 정화와 비움과 수용성의 필요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을 찾기 위해 우리는 다른 모든 관심사를 제쳐두어 하느님과 우리의 참된 자아를 알아내도록 해야만 한다. 종종 이것은 '영적 친교'가 하느님께 대한 이미지보다는 우리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껴달아야만 한다. 우리는 지적 지식과 기억들과 제한된 희망이라는 기능의 평범란 대상들을 넘오 가야만 한다.(영적 찬가 1, 12-13)
하느님께서 사랑의 건드리심 뒤 숨으시는 이유
① 상사병의 결과 하느님께서는 모습을 드러내시지만 또한 숨으신다. "그 이유는 영혼의 건겅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영혼은 사랑이 온전해지기까지 완전한 건강을 유지하지 못한다."(영적 찬가 11,11).
② 우리 자신이 만든 하느님께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우리가 계속해서 찾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때때로 숨으신다. 우리는 어두운 밤에 이러한 거짓 신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우리 자신의 지식과 기억과 사랑에 매달리는 것은 진정한 하느님의 계시를 가로막는다. 종교적 확신조차 우리를 진리로 이끌지 못한다. 우리의 지식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방해한다.
③ 우리 세상의 암울한 고통이 하느님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우리 시대의 고통은 우리가 양심으로부터 숨으면서 진리를 감추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가로막는데 능숙해진 것에 어느 정도 기인한다.
숨어 계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추구
자유로운 모든 이들은 수많은 당신의 은총을 내게 이야기합니다.(영적 찬가 제7노래)
사실 우리는 전부(Todo)이신 하느님께 집중할 때 삶의 무가치한 것(Nada)을 제쳐 두고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여겨야만"(영적 찬가 1,6). 우리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떠나서 거둠 속에서 우리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하며 우리 자신의 영의 깊은 곳에 하느님과 함께 몸을 숨겨야만 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더욱 많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믿음과 사랑은 네가 알지 못하는 길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숨어 계신 곳으로 너를 이끌어 줄 소경의 길잡이"(영적 찬가 1.11)와 같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하여 우리가 이해하거나 경험한 것으로 기뻐할 수가 없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만 기뻐할 수가 없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만 기뻐할 수 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뵙는 것은 어두움 속에서이다.
우리는 관상의 어두운 밤 속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찾는데, 이것은 생활 개선과 하느님께만 집중하는 마음과 우선적으로 모든 삶을 하느님을 따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우리의 잘못들을 주의 깊게 바로 잡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고 나사 어두움 속에서 빛을 받듯이 하느님의 조명을 받을 준비를 할 수 있다. 본문의 영혼처럼 울도 더 이상 사자들을 바라지 않는 지점에 도착해야만 한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관상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 주시는 것이 아닌 그 어떠한 것에도 만족해서는 안 된다.
2.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서 친교를 나누신다.
신부와 사랑하는 님 사이의 친교
이러한 친교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이루어진다(영적 찬가 14-15, 23)
제6노래에서 영혼은 사랑하는 님에 대한 천 가지 은총을 전해 주는 조용한 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분은 영혼을 놀리듯이 다른 것들을 통해 자신을 전해 주시지만, 당신 스스로 직접 전해 주시지는 않는다.(영적 찬가 6,6). 거기에서 그녀는 침묵 중에 매우 적은 것만을 전해주는 것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더듬거림을 경험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두 사람만으; 이러한 친교는 "즐겁고 사랑스러운 저녁 잔치"다. 그것은 영혼의 기능들이 "하느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영적인 소리를 영 안에서 가장 좋은 음향으로 받아들이는"(영적 찬가 14-15,26) '사랑의 화음을 이루는 음악'이다. 그것은 매우 친밀한 사랑으로 영혼에게 전해 주시며 영혼을 통해서 입김을 불어 주시는 성령께서 방문하시는(영적 찬가 17,8) 순간이다. 영혼이 "죽어야 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숨겨진 경이로움"(영적 찬가 19,3)을 받는 침묵과 은밀함 속에서 이러한 전달이 이루어진다. "몸을 숨기셔요. 내 사랑이여, 얼굴 돌려 산들을 보시고, 아무 말도 마셔요"(영적 찬가 19 노래).
마침내 신부가 영적 혼인에 다다르면, "그녀가 자기 신랑께 대한 유일하고 고독한 사랑의 평론함 안에서" (영적 찬가 35,1) 자신의 사랑을 오직 사랑하는 님께만 맞추며 고독과 침묵과 단숨함과 영의 가난 속에 따로 떨어져 산다. 그분께서는 그녀의 고독과 침묵 속에서 기뻐하시고, 이것이 그녀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보시고, 당신의 사랑을 주시며 응답하신다.
변화적 침묵
이러한 친교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이루어진다.(영적 찬가 39, 12).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서 전해 주신다. 하느님의 속성에 대하여 우리가 이해하는 것의 일부는 내적 사랑을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나누시며 세상에 끊임없이 그 선물을 주시는 것이다. 인간은 종종 그것을 들을 수 없고 듣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곳에 그 사랑을 전해 주신다. "온 세상은 하느님으로 불타오르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만 신발을 벗는다. "라는 말은 우리에게 그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신랑께서는 신부가 고독을 택한 것을 칭찬하신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지면 그녀는 그녀의 사랑을 님께 집중하며 혼자 쉴 수 있는 고요와 평화로운 고독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영혼은 그녀가 완전한 고독, 완전한 휴식과 활력을 발견하게 되는 영적 혼인에 다다르기 전에 고독 속에서 산다. 이렇게 고요한 고독 속에서 사랑하는 님께서는 이제 그녀를 하느님께 대해 더욱 깊은 사랑에로 이끄시며, "신적인 것 에로 안내하시고 움직여 주시고 높이신다."(영적 찬가 35,5). 그녀는 고요한 고독 속에서 쉬는 것을 배웠는데, 거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서 당신을 전해 주신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성령 안에서 쉬는 침묵을 강조한다.
관상을 할 때 우리는 성령께서 전해주시는 것을 듣고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열라는 부르심을 깨닫는다. 고요한 휴식 중에 우리는 우리 마음이 두 가지 형태의 님을 반결하도록 준비할 수 있다. 관상은 빛을 비추어 주는 기쁜 것이지만 동시에 정화적이고 고통스럽다. 하느님께서 새로운 지식을 주시며 옛 지식을 벗겨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말이나 소리도 없고, 육체적-영적인 감각의 도움도 없이 침묵과 고요 가운데에서 모든 감각적-본성적인 것들을 어둡게 하듯이, 관상을 통하여 매우 조용하고 비밀스럽게 영혼을 가르치신다."(영적 찬가 39, 12).
변화는 침묵 중에 온다. 성인 자신은 혼자 버림받았을 때 ㅐ 경이로움의 전달을 들었다. 관상적 침묵 속에서 우리는 삶의 감각적 차원을 조용히 시키고 영적 활력을 전적으로 하느님 사랑을 추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을 우리 스스로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 약혼의 잠 속에서조차 "영혼은 평화로운 밤의 모든 고요와 휴식과 평온을 소유하고 즐긴다. 그리고 이 평화와 함께 하느님 안에서 무한한 신적 지식을 받는다."(영적 찬가 14-15. 22).
경청하는 법을 배움
"(그분께서) 네 안에 얼마나 훌륭한 것들을 창조하셨는지 말해 주겠니?"(영적 찬가 4,7)
우리는 마음의 소리를 경청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신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호세 2,16). 신부는 그녀가 사랑하는 님을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는 그녀의 마음이 혼란스럽고 상처를 입고 병들고 충족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그녀의 사랑은 그녀로 하여금 사랑하는 님을 찾도록 하고 그녀는 더 깊은 합일을 갈망하고 사랑하는 님의 현존에 황홀해하고 합일 속에서 기뻐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님을 위해 모든 힘을 그분을 섬기기 위하여 사용하고 다른 어떠한 관심도 가지지 않고 사랑만이 그녀의 일일 뿐이다.(영적 찬가 28 노래).
우리는 하느님의 사자(使者)들의 말을 경청한다.
(영적 찬가)는 우리 영정의 초기 단계에서 하느님의 사자들의 말을 경청하도록 요구한다. 영혼은 내면의 영의 말을, 그녀의 사랑하는 님을 보았을 목동들의 말을, 하느님 현존의 흔적을 드러낼 피조물의 말을, 님의 말씀을 경청한다. 모두가 그녀에게 그녀를 부르고 치유해 주고 요구하고 충족시켜 주는 하느님과 끝없는 신적 사랑에 대한 것을 말해 준다. "이 '목소리'는 영혼이 여기에서 알고 있다고 말했던 '울려 퍼지는 고요'이다. 즉 그것은 모든 만물이 스스로 하느님께 대하여 알려 주는 증언이다"(영적 찬가 14-15, 37).
우리는 또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요구를 경청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완전히 변하라는 하느님의 요청을 경청하는 사람의 완전한 모범이다. 그의 일생은 초기 성장의 어려움과 회심 그리고 박해와 버려짐과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합일을 끈 없이 추구하는 증거가 된다. 그의 일생은 상처를 입고 치유받는 인간성의 두 가지 위대한 경험을 구현했다. 그리고 (영적 찬가)는 이러한 두 가지 위대한 경험이 어떻게 우리 모두의 삶을 가득 채울 수 있는가의 문제를 설명해 준다. 그의 삶은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삶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침묵 중에 당신을 전해 주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경청함으로써 성인의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3. 변화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과 선물
영적 여정의 목표
그분께서는 그분 안에서 사랑을 통하여 변화되도록 이끄실 것이다.(영적 찬가 1,10)
변화는 영적 혼인(영적 찬가 22-25 노래)에서 일어난다. (영적 찬가)의 나머지 모든 부분은 준비(금욕; 영적 찬가 제1-5 노래), 영적 악혼(영적 찬가 13-21 노래)이다. 그것은 더 깊은 합일과 신적 신비의 계시(영적 찬가 36-40 노래)를 통하여 영원 속에서 계속된다. 변화는 우리가 하느님의 행위를 우리 안에 받아들이게 되어 하느님께서 우리의 거짓 갈망과 거짓 신들을 정화하시고 우리를 넘치는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 채우시는 관상 속에서 일어난다.
합일에 대한 처음의 열렬한 갈망과 함께 여정의 금옥적 과정과 조명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신부는 "하느님께서 변화를 통하여 사랑 속에서 하느님의 장엄하심을 그녀에게 알려 주시는"(영적 찬가 13,1) 영적 약혼의 단계에 들어선다. 이러한 전달의 일부는 신부를 꾸미시고 그녀를 준비시키시는 신랑의 덕들의 선물들이다. 나중에 그분의 선물들은 "그분 자신 안으로 그녀를 변화시키는 것"(영적 찬가 17,10)을 포함한다. 신랑의 부재처럼 보일지라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부를 변화하도록 준비하는 데 능동적으로 참여하신다. 영적 혼인 이전의 이러한 마지막 준비 단계는 신랑께서 신부의 환상과 상상, 분노와 용적, 지성과 기억과 이지의 세 가지 기능들과 기쁨, 희망, 두려움과 슬픔이라는 네 가지 정들(영정 찬가 20-21, 4)의 부정적 모습들을 제어하시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준비가 완전해지면, "영혼은 그녀와 하느님의 아드님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거룩한 약혼인 복된 합일을 영원히 받기 위해서 정화되고 고요해지고 굳세어지고 안정된다.(어두운 밤 2, 24,3). 관상을 통해 이러한 준비를 하면서 영혼은 수동적이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에 대하여 우리를 분비시키시는 작업이다. 개개인들은 그 길에 협력해야만 하며, 이러한 수동적 성향의 준비조차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할 뿐이다.
영적 여정의 목표는 신부를 산랑의 참된 사랑이 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영적 혼인의 변화에서 신부는 사랑하는 님을 소유하고 그 님께 소유된다. 이러한 단계는 영적 약혼과는 다르다. 그것은 "각자가 일종의 완성된 사랑의 합일을 통해서 자신이 소유한 것을 온전히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사랑하는 님 안에서의 완전한 변화이기 때문이다." (영적 찬가 22,3). 그러한 합일은 너무나도 친밀한 것이 오서 신부와 신랑 모두 하느님처럼 보인다. 이러한 합일 안에서 신랑은 신부에게 선물들과 덕들을 부어 주시고 합일과 완전한 사랑과 영적 평화를 주시면서 그녀를 변화시키신다.
그분께서는 사랑 안에서 상호 관계를 확립하시고 그녀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고 그녀에게 일상적 평온을 부어주시고 그녀를 사랑 안에서 그분과 같게 만드시니, 그리하여 그녀는 사랑하는 님과 유사함의 합일을 줄긴다. 그렇게 친밀한 사랑 속에서 변화된 신부는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러한 선물들을 즐긴다. 이러한 합일은 그녀로 하여금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한 모든 갈망과 즐거움을 통제하는 차원이 아닌 모든 것을 잊고 물러나도록 이끈다. 영혼은 이제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서 즐기게 된다.
하느님께서 참된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전해 주실 때, 신부와 신랑은 서로를 내어 주지 않을 수 없다. "그녀를 당신으로 변화시키심으로써, 당신 께서는 그녀를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만드시고, 그녀가 지니고 있는 것들 중에서 당신이 아닌 모든 것을 그녀에게서 비우신다"(영적 찬가 27,6). 영적 영혼이 영적 혼인을 준비하는 것이기에, 영적 혼인은 신부가 사랑하는 님처럼 될 때, 그녀의 신적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완전한 변화를 위한 준비가 된다. 변화는 지극하고 완전하며 강한 사랑에서 끝난다. 시는 신부가 사랑 안에서의 이렇게 영원한 합일을 갈망하면서 끝난다. 영혼은 이탈하고, 악을 쫓아냈고 욕정을 지배하고, 감각적 부분은 개선되어 사랑의 보화들에 참여한다. 이 세상에서의 그녀의 변화는 온성되고 그녀는 영원한 합일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이것이 능력과 지혜와 사랑에 있어서 하느님의 세 위격으로의 변화이고, 이것으로 영혼은 하느님을 닮게 된다"(영적 찬가 39,4).
사랑의 추구에 대한 전적인 전념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사랑이 부족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영적 찬가 3,12)
십자가의 성 요한은 생명의 완전함을 찾는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도록 볼림 받았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고 우리 자신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여정은 우리가 믿음 속에 살고, 이전에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이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에 포기이며, 미지의 셰로 나아가며 과거로부터의 습관을 허물 어뜨리는 것을 암시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와 사랑"을 보내기를 원하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하느님, 제 마음이 준비되었습니다."(시편 57, 8)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타적인 사랑의 선물을 사랑의 삶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도록 마음을 다져야만 한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여정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처럼 사랑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여정은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닌 다른 어떠한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고 온전히 당신과 함께 있고 그리하여 늘 당신을 생각할 그때, 영혼은 참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영적 찬가 1,13).
우리의 현신은 우리의 부르심을 인식하면서 시작되고 우리는 이러한 비참한 현실을 신중하게 성찰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으로 하느님과 합일하라는 개인작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가 이전에 이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과 정체성과 운명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이미 한다. 사랑으로 합일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지속적으로 목표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에게 동기부여를 해 주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정체성과 지속적인 목표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희망과 꿈과 가장 깊은 갈망들을 찾기 위하여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관상적 성찰을 찾기 위하여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 거는 여정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관상적 성찰을 할 때 우리의 지각에 한계와 마음 내키지 않는 부르심에 너무나 쉽게 만족하려는 마음에 맞서서 홀로 있을 능력을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부르심에 대하여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생각하도록 불림을 받았고 이것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 앞에 두신 그 위대하심에 대한 겸손한 마음을 요구한다. 궁극적으로 영적 성장이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의 신비에 대하여 인식할 필요가 있고 이러한 부르심에 복종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사랑의 전적으로 현신해야만 한다.
결론
(영적 찬가)는 성인이 단순히 자신이 고유한 영적체험만 서술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영원한 사랑의 합일에 초재 된 불림받은 존재하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한 책이다. 그래서 하느님 현존과 신비적 친교에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 위해 '짧고 좁은 길'을 제시해 주고자 노래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 책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과 신비적 가르침에 접근하고자 한 우리의 노력들은 세 가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이라는 최종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영적 여종 있다는 것,
둘째, 영적 여정 안에 여러 상징적 표현들이 있고, 이런 상징들은 성인의 다른 처서들을 이해하는데 전지식이 된다.
셋째, 영적 혼인이란 신비신학적 배경을 두고 성인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간 영혼의 완성으로 따라나서는 영혼의 본질적 소명을 우리로 하여금 불러일으킨다.
27. 거기서 내게 당신 가슴 주셨네,
거기서 감미로운 지식을 내게 가르쳐주셨네.
나도 내게 남은 것 없이
진실로 들었네.
그이 신부 되라란 약속도 거기서 하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