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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의 성전

성엘리야리베르또 2024. 5. 31. 16:17

하느님의 사랑의 역사적 표현인 인간은, 그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나오고 자신의 최종 목표로서 동일한 그 하느님의 사랑을 향하면서, 창조주께로부터 하느님의 "모사이자 유사성"으로서 창조되었다. 

인간에 대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시각 안에서, 우리는 성서적 인간관의 원천적인 논거(論據)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이 특성이야말로, 성인의 가르침을 특징짓는 인간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깊은 감탄의 근본적인 동기 중의 하나이다. 

죄와 그 결과들이 인간의 영혼 안에 던져 놓은 인간의 "추악함과 더러움"을 부각시키고 고발해야만 하는 그런 경우에조차, 성인은 이런 점들을 물론 부각시키면서도, 아주 열렬한 향수(嚮愁)의 분위기안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향상 외치고 일깨운다. 이 인간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은 인간 영혼의 것이고 인간의 영혼을 "그 자체로 무한히 아름다운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인 한"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영혼의 노래」 마지막 부분에서, 현세에서 인간이 성삼위 하느님의 생명에 인격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하느님 안에서 인간이 얻어 낸 성숙함의 극치를 발견하고, 그 영혼이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그렇게도 엄청난 가능성의 인간학적 기초를 찾아 나선다면, 다음 말씀에서 원천적인 자료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영혼을 양육하시는 분(하느님)과, 그분의 모습과 그 유사성에로 인간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 안에서의 하느님의 모습의 심원한 역동적 성격을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부각시키는 것은, 바로 기초로서, 가능성으로서, 또 인간의 성화(聖化)가 시작되는 출발점으로서의 이 전망 안에서이다. 성인은 「영혼의 노래」에서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긴장 상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간 영혼은 마치 자신을 그려 낸 화가(畵家)는 스케치와도 같은 것이다. 

「로망스」를 분석하면서 우리는 이미, 인간이 영원으로부터 성부에 의해 성자와의 충만한 유사성에로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이는 신약성경의 시각(視覺)의 직접적인 반향이고, 특히 인간 안에 부여된 하느님의 모상의, 눈으로 뵈올 수 없는 하느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계시에 비추어 볼 때 완전한 그리스도론적인 함축성을 가지고 있고, 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이자 하느님을 닮은 존재"라는 면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이 완전하게 실현되었다는 바오로 사상의 반향이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에게는, "신앙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 안에서 살아 계신 모상(模象), 즉 그리스도를 찾는 존재"이다. 

창조로부터 또 강생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답게 꾸며진, 하느님의 아름다움으로 고양(高揚)된. 아름다움과 품위를 갖춘 존재로서 이 흔적으로 상처를 입은 영혼은, 자신의 정배이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아름다움 안에서 자신도 그런 아름다움으로 그분을 닮아가면서("신부新婦인 영혼은 자신의 신랑이신 하느님을 더욱 닮아 감으로써 그 모든 것을 행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당신 아름다움 안에서 우리 자신들을 보러 가십시다; 무슨 뜻일까? '앞서 언급된 이 사랑의 훈련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 안에서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우리를 볼 수 있는 데까지 도달하도록 하십시다. 이를테면, 그런 방법으로 제가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변모되고 아름다움에 있어 당신과 비숫해져서 당신의 그 아름다움 안에서 변모되고 아름다움 안에서 우리 서로를 바라보십시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서로가 서로 안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십시다. 서로 다른 개체이면서도 제가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 흡수되어 오로지 당신의 아름다움만을 보십시다. 이렇게, 저는 당신을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당신은 저를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저는 당신 안에서,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저 자신을, 당신은 제 안에서,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당신 자신을 바라보십시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당신을 닮고, 당신은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저를 닮아, 제 아름다움은 당신의 아름다움이 되고 당신의 아름다움은 제 아름다움이 되어, 저는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당신이 되고, 당신은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제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이 베 아름다움이 될 것이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를 당신의 아름다움 안에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노래 B 36,4-5)). 완전히 변모될 때까지, 이런 가시적(可視的)인 아름다움들의 완천이신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그 아름다움을 뵙게 되기를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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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은 자신 안에서 살아 계신 모상을 찾는 법이다.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성전(聖殿2 코린 6,16 참조)"인 인간의 뛰어난 존엄성이 이루어지는 곳은 자기 자신의 내면(內面)이고, 인간이 "살아 계신 모상"을 찾아야 하고 찾아내야 하는 그곳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층 더한 풍요로움을 얻어 만날 수 있는 그곳이고, 신앙의 눈길이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현존을 발견하고 그 현존을 받아들이게 되는 그곳이다. 요한 성인은 인간을 "살아 있는 성전'이라고 부른다. 이 성전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께서 비밀스럽게 거처하시는 바로 그곳이다. 

 

「가르멜의 산길」에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인간 안에서의 하느님의 이 현존을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자연적:인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모든 영혼 안에서 그의 존재를 유지하시면서 실체적(實體的)으로 거처하시고 그에게 힘이 되어 주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유사성(類似性)을 가지도록 오시는 경우"를 말하는데, 이는 "인간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반대하지 않고 둘이 완전히 일치되어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성인은 「사랑의 산 불꽃」의 "그대 홀로 비밀스레 머무르시는 그곳"이라는 구절에 대한 설명에서 이와 비숫한 구분을 한다. 

 

"그 품 안에 비밀스레 거처하신다고 함은, 이미 우리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영혼의 실체(實體)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 감미로운 포옹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영혼들 안에 비밀스럽게, 영혼들의 실체 속에 당신 자신을 숨기시고 거처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현존(現存)이 없이는 영혼들이 유지될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하느님의 "머무르심"에는 차이가 있고, 사실 차이가 많다. 왜냐하면, 어떤 영혼 안에는 당신 홀로 머무르시고 또 어떤 영혼 안에는 그렇지 않으시고, 어떤 영혼 안에서는 기쁘게 머무르시고 또 어떤 영혼 안에서는 그렇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어떤 영혼들 안에서는 하느님은 마치 당신 집에 계시듯이 모든 것을 명령하시고 이끄시면서 머무르시지만, 또 다른 영혼들 안에서는 마치 남의 집에 머무르는 타인처럼 머무르시고, 거기서는 그분께 무엇 하나 명령하시거나 무엇하나 하시게 해 드리지도 않는다. 

영혼 자신의 욕구나 맛을 더 적게 가진 그런 영혼 안에서는 하느님은 더 홀로 계시고 더 기쁘게, 더 당신 집에 계시는 것처럼, 그 영혼을 이끄시고 다스리시면서 계신다. 더 비밀스럽게 머무르시는 만큼 더 홀로 계신다. 

 

인간 안에서의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 성삼 위의 현존!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충실히 반향 한다. "--- 우리가 그에게로 가서 그 안에서 살 것"이라는 말씀을 이렇게 해설한다. "말씀이신 하느님의 아드임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본체적으로 실제로 영혼의 존재 내부에 숨어 계신다. 

하느님의 살아 움직이시는 현존이야말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답게 꾸며진 영혼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인과 함께, 이 하느님의 인간 안에서의 현존이 항상 인간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생활화(生活化)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미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사랑의 산 불꼴」의 한 부분에서, 성인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비밀스럽게 숨어서" 머무르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영혼의 노래」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숨어" 계신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 안에 하느님의 현존을, 숨어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현존을 향유하기 위한 것이다. 지질줄 모르고 하느님을 찾는 존재로서, 또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속한 순례자로서, 인간은 그분을 "자기 자신 밖에서" 찾을 게 아니라, 성인이 "자신을 숨김"이라고 표현하는 그 끊임없는 내재화(內在化)의 길을 통해서 자신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성인은 경고한다. 

 

"왜냐하면, 숨겨진 무엇을 찾아내야 하는 사람은 그 무엇이 숨겨진 그곳에까지 들어가야만 하고, 그 숨겨진 무엇을 그가 찾았을 때에는, 그가 찾은 그 무엇과 함께 그 자신도 숨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대의 표현들에 따르자면, 사랑을 받으시는 신랑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현명한 장사꾼이 그것을 처지 하기 위해 가진 것을 다 팔아 버리는 그런, 그대 영혼이라는 말에 숨겨진 보물과도 같으신 분이시다. 그대가 그분을 찾아낼 수 있기 위해서는, 그대가 그대의 모든 것들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온갖 피조물들을 멀리하고 그대의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말하자면 그대의 의지를 다름 모든 것들로부터 거두어들이고, 숨어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과 그분과 함께 그대도 숨어 있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그분과 함께 숨어 있으면서, 그분을 느낄 것이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향유하게 될 것이고, 그분과 함께 숨어서 말이나 느낌이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훨씬 넘어서는 그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인간 안에 숨어 계시는 하느님의 이 현존의 빛으로써,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마음을 움직이라는 그런 요구가 나타나고, 이런 내적인 요구는 결국 우리를 "하느님을 찾는 자"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영혼의 노래의 표현들에 따르자면, 이 움직임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모든 사물들로부터 나옴 ☞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감

                                   자신으로부터 나옴 ☞ 하느님 안으로 들어감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감" - "자신으로부터",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여정은 인간 자신의 내부를 반드시 통과하게 된다. (이 내재화(內在化)의 과장에 대해서 Fernando Urbina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재화는 수덕적인 은둔의 문을 통과함으로써 시작되고, 관상의 여러 단계들 안에서 더욱 뛰어난 깊이를 얻어 누리면서, 결국 어떤 마지막 상황에까지 나아가게 되는데, 신비가들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 마지막 상황이란 바로 영혼의 중심, 혹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가 들은 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께서 거처하시고 이곳이야말로 영혼이 하느님과의 가장 친밀한 사귐이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가르친다. '초월'을 위한 움직임은 인간 존재의 점점 더 깊은 곳을 통해 인간을 인도해 나간다. 이렇게 인간을 인도할 때에, 이 움직임은 인간에게 점점 더 깊이 있는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표면적이고 외적인 활동을 그에게 감추어 버리는 그런 상태들을 점점 더 인간에게 드러내 보인다") 이는 내 재화의 과정이고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 안에서 자기만족 안에 안주함으로 이 움직임을 끝마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내적(內的) 여정을 통해 자신을 초월하기 위한 것이다. 이 움직임의 결정은 하느님 안에 놓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 안으로 들어감"은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나옴"을 수반하는 것이다.

패르난도 우르비난의 말을 빌려 이 내용을 다시 종합해 보자.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다음과 같다. 

영혼의 밑바닥, 영혼의 실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하느님이 현존하신다. 이 현존은 자연적인 혹은 본체적인 현존이라 불릴 수 있는 것으로서, 인간의 존재에게 존재 자체를 부여하는 하느님의 존재의 본체적인 현존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비적 차원의 초자연적 은총의 효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즉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그런 내재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 내재화는 자신 안에 머무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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