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 오직 하느님만이 - 익나의 참된 지평이시고 인간 실존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긴장 관계 속에서 자기 의미의 충만함을 찾는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에게는, 이런 내용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지평 안에서 - 그 지평의 가장자리에서나 그런 지평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 인간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쟈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피조물들"은, 인간 실존을 자신에게로 끌러 당기는 그런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피조물들은 항상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사용되는 것으로서 "수단"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극적 사건들을 통해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의 긴장 상태 안에서 살아간다. 그런 상황들에 비추어 보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는 세 존재를 만날 수 있다.
-하느님 : 그분은 초월적이시고 "우리가 붙잡을 수 없는" 분으로서 우리 능력을 벗어나시는 분이시다.
-세상 사물들 : 반면에, 이것들은 우리에게 인접한 것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앞에서 항상 어떤 "공허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다.
-인간 : 역사적으로 죄의 표지를 받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인간 안에서 죄는 아주 뿌리 깊은 무질서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그들로부터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그런 두 실재(實在) 사이에서 실존적인 긴다 상태를 겪으면서 살아간다.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궁긍적인 묵적이신 하느님께로 향해진 존재로서, 그분을 얻음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충만함을 얻을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은 세상 안에 있는 존재로서, 자신의 삶의 자리인 이 세상을 벗어던지지도 못한다.
인간 실존에게 결정적으로 영구히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높은 것이나 낮은 것이나 세상 모든 것들 안에서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완덕에 있어서도 공로에 있어서도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권고한다. 성인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을 목적인(目的因)으로 받아들일 경우에 이 태도 자체가 다른 목적들을 그 앞에 두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이 "실존적 긴장 상태"가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세상의 가장자리에서가 아니라 세상 그 자체 안에서 자기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세상의 가장자리에 머무른다는 것이 죄로 상처를 입은 그런 인간을 위험들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미 지적했던 대로, 세상이 인간을 향해있는 것이지 인간이 세상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성인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이 질서의 관계를 뒤집어 놓지 말아야 할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가진 단 하나의 생각이 온 세상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따라서 오로지 하느님만이 인간에게 어울리는 분이시다.
세상은 인간을 향해 있고 인간은 하느님을 향해 있다. 여기에 창조주께서 당신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창조 안에 반영하신 그대로의 균형과 질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균형은 항상 유지되지는 못한다. 이것은 오히려 종종, 인간이 하느님을 -마치 자신의 하느님이 아니신 것처럼-잊어버리고 우상들에 대한 숭배에 떨어질 때에, 또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이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킨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그런 일시적인 것들, 서글픈 목적들은 마치 자신의 하느님이고 목적인 양 자신의 궁극적 목적이신 하느님 앞에다 놓음으로써 그것들을 취할 때에, 그런 인간에 의해 이 균형은 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께 관한 일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세상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만능(萬能)인" 그런 인간 실존의 한계성이란, 사실 이 한계성이 대단히 일반적인 것이긴 하지만, 인간의 상황에 대한 감상적인 묘사이다.
우리는 이미 피조물들 안에서의 어떤 "공허함"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더 정확하게 "이 공허함은 피조물들과 인간의 활동과의 직적적인 관계 안에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피조물들"이라고 간주된, "창조주의 흔적 혹은 자취"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그 "매체들"은 - 신비 박사의 평가에 따르면 - 분명히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가진 것들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그 피조물들을 초원하지 못하거나 어떤 투명성 안에서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의지가 그것들에 집착하게 될 때에는, 상황은 완전히 부정적인 것이 되고 만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요한 성인에게 있어서는, "하느님 - 인간 - 세상 사물들"을 연결하는 그 관계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정확한 평가의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가르멜의 산길」 1권 4장은 이런 전망 안에서 읽혀야 할 것이다. 거기서는 단순히 피조물들과 하느님을 그 자체로 대면하는 것만을 다루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또 피조물들 앞에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위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가르멜의 산길」 1권 4장에서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존재는 마치 무(無)에 대한 존재(存在)의 관계처럼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이 텍스트와 이와 연관된 「가르멜의 산길」 1권 3장의 텍스트를 잘 읽어 보면, 우리는 거기서 말하는 "무"라는 용어는 사물의 실존적인 실재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 실재들에 묶어 버리는 '맛'에 적용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장(章) 전체와 "전(全)과 무(無)"의 변증법과 영적으로 성숙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해석학적 열쇠는 아마 "사랑의 산 불꽃" 안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물들은 그에게 무(無) 일뿐이다. 그 자신도 자신의 눈에는 무일뿐이다. 오직 그의 하느님만이 그에게 있어서 "전부"이시다.
그래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아무것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하는 복음적 바탕에 비추어, 끊임없이 인간 행위에 대한 지속적인 확인을 요구하는 것이다. 성인은 영혼, 즉 인간 실존이란 "자신이 사는 곳에서보다 사랑하는 곳에서 더 진정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말하자면 성인에게 있어서 사랑은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고 "닮게 만든 것"이며, 인간의 사랑의 방향이 과연 무엇을 행해 있는지를 판단함으로써- "사랑은 목적과 연관성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 인간 실존의 방향 설정과 그 결말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성인은 인간이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판별하기 위한 일련의 판단 기준들을 제시한다.
-"세상의 어떤 사물로 만족해하지 않는지?"- "자신에게 쏟을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하느님을 향한 열망" 안에서 "다른 무엇을 좋아하지는 않는지?"-"세상 사물들이 그를 만족시키지 않고" "하느님을 향한 그의 갈증과 욕구를 더 커지게 만드는지/" 등등
인간은 오직 하느님과의 "진정한" 관계 안에서만, 자신의 궁극적인 소명에 응답하는 그런 관계 안에서만, 창조와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지평이 기기를 그만두시게 되는 때에는, 인간과 피조물들과의 관계는 "무질서"의 낙인이 찍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