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3. 욕구들의 역동성

성엘리야리베르또 2024. 6. 28. 12:00

"욕구들"에 대한 내용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아주 전형적인 테마이다. 

성인은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작품들 안에서 길게 설명하고 자세히 분석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욕구들 그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 욕구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와 인간의 삶 안에서 욕구들이 행하는 역할 때문에 이 욕구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이고, 인간의 궁극적 소명의 실현에 관심을 가진 것일 뿐이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이 소명의 대신덕적 특성을 살펴보았다. 이 소명은 오로지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자신을 열고 사랑 안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림으로써 그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때에만 실현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에게는, 욕구들이란 데신덕적 사랑에 대한 반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욕구들은 사랑에 반대되는 역동성의 표현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욕구들은 하느님과의 사랑의 친교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인간의 충만한 실현을 방해하고 마비시킨다. 그렇게 이 역동성은 인간 존재 자체 안에서 죄에 읳 생긴 상처와 무질서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죄 혹은 존재의 일그러짐은 특히 일탈 안에서 드러난다. 사랑의 일탈이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욕구들'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가르멜의 산길」 안에서의 '욕구들'의 엄청난 중요성은 윤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훨씬 대신덕적인 것이다. 욕구들은 특별한 능력들이 아니고, 역동적이고 윤리적인 어떤 범주인데, 발하자면 윤리적으로 부정적인 가치와 함축성을 가진 감성의 움직임이고 성ㅎㅇ, 즉 기울어짐, 이끌림인 것이다. 욕구들은 인간이 존재 안에 살아 있는 그 무질서의 가시적(可視的)인 영상이다 

욕구들은 인간을 묶어 버리고 마비시키고, 사랑 안에서의 인간 자신의 인격적이고 긍정적인 충만한 발전을 방해한다. 욕구들은 일종의 "집착"일 뿐 아니라 일종의 진정한 퇴화이다. 성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더 고약한 것은, 인간이 단순히 이것들에 붙들려서 나아가지 못할 뿐 아니라,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들여 이미 걸어왔었고 얻어 왔었던 것을 잃어버리고 뒷걸음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이 길에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곧 뒷걸름치는 것이고, 계속 얻어 내지 못한다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구들"을 대신덕적 사랑에 대한 반대로서 알아듣지 않고서는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욕구들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두 가지 역동성은,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서로 반대되는 이 두 가지 역동성은,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서로를 비추어 주고 더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이다.

a) 대신덕적 사랑은, 대신덕적 면에서 볼 때, 의지를 "하나가 되게 하고", "조화시키고", "완전하게 한다." 또한 사랑은 인간이 가진 모든 가능성에 어떤 틀을 제공하고 방향을 제시해 준다. 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성인이 자신의 다음 노래에 대해 해설하는 부분을 다시 읽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내 영혼 임 한 분 섬기기에

가진 것 다 바쳤다네.

이젠 양 떼도

다른 할 알도 네겐 없다네.

사랑하는 것만이 내 할 일일 뿐

 

b) 반대로, 인간 실존을 엄습하고 이를 지배하는 욕구들은 인간 안에서 참으로 사랑에 반대되는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 즉 인간 영혼의 풍요로움을 갈가리 찢어 내고 나누고 흩어지게 하고 그 풍요로움을 낭비하게 만든다. 게다가 더 나쁜 것은, 인간의 요구들은 이런 결과들을 억제하지 않고, 인간 실존 안에 영속적인 어떤 상태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사랑에 반대되는 역동성으로서 만일 욕구들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합일을 방해하면서 인간 안에서 대신덕적 사랑을 막아 버리는 것이라면 하느님과의 거룩한 합일을 인간이 얻어 누리기 위해서 모든 욕구들은 최소한의 욕구들까지도 -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물들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사물들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한, 그 사물들이 없어진다고 영혼이 적나라해지는 것은 안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물들에 대한 맛과 욕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인인데, 이것이 이야말로, 비록 사물들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 영혼을 그 사물들로부터 자유롭고 비어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 사물들은 연혼 안에 들어갈 수 없기에 영혼을 차지할 수도 없고 영혼에게 해를 끼칠 수도 없지만 인간 영혼 안에 살고 있는 사물들에 대한 욕구는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 덕분에, 우리는 이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욕구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분명한 열쇠를 쥐고 있다. 즉 하느님의 지평으로부터, 또 인간 실존의 근본적으로 하느님께로 향해진 방향 설정으로부터 벗어나 있거나 혹은 그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그런 피조물들 앞에서 인간이 취하는 행위에 대해 성인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욕구들이 역동성으로부터 드러나는 희미한 불빛 안에서, 우리는 오로지 한 가지 긍정적인 존재의 능력과 가능성이 상당히 파괴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능력과 가능성이 다른 역동성 - 즉 사랑의 역동성-으로부터 제대로 질서 지어지고 실천된다면, 이것들은 인간이 자신을 충만하게 실현시키기 위해 소유한 엄청난 부유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능력과 가능성에 대한 이 증언은 간접적인 것이긴 하지만 아주 감동적인 것이다.

그 "대상"과 "주체"라는 두 가지 시각에서, 우리는 인간 안에서의 욕구들의 역동성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a) :대상"에 대해서는, 감수성이 감각의 분산을 쉽게 만들면서 올바른 질서를 해치는 다른 존재들 안에 집중되는 동안, 욕구들은 자신의 존재의 출발점에 있어서나 종착점에 있어서나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어떤 거절을 표현한다. 

b) "주체"에 대해서는, 욕구들이 현실 앞에서 무엇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어떤 활동을 만들어 내고 참으로 "종속"적인 어떤 관계를 만들어 내는 동안, 이 욕구들은 상호 간의 "내어 준"과 "받아들임"으로 이루어지는 무상(無償)의 사랑의 역동성을 거절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에게 있어서,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대신덕적 소명에 비추어 볼 때, 분명한 사실은 욕두들의 요구구를 따라가면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반자연적(反自然的)인 상황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 그리고, 선택된 백성의 우상숭배를 고발하고 단죄하기 위해 이스라엘 위대한 예언자들이 사용했던 그런 어조(語調)와 그런 말씀들로써 그 자신이 이런 활동을 고발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

 

 

  

 

728x90